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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8. 7. 14:40

대관령 재궁골 국사 성황당과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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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재궁골 국사 성황당과 산신각

 

-대관령 성황이 된 범일국사와 산신 김유신 장군

 

 

해마다 음력 55일에 강릉 시내는 떠들썩하다. 양수인 5가 둘이나 겹쳐 일 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다. 농경문화 중심의 우리민족은 이날 파종제를 하늘에 올리고, 본격적인 모내기에 들어간다. 단오는 수릿날, 천중절, 중오절, 단양절 등으로 불렸다. 민간에서는 단오세시풍습으로 물맞이, 창포물에 머리 감기, 씨름, 그네뛰기 등 다양한 민속 몰이들이 펼쳐진다.

특히 강릉지역 단오제는 대관령 성황과 산신에게 제의를 올리고, 강릉으로 모셔오는 신주빗기로부터 시작된다.

 

 

범일국사와 김유신 장군 그리고 허균

 

대관령 산신은 신라의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김유신 장군이다. 이를 처음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학문의 기본으로 두고 있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 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있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를 생각하기도 했을 정도로 불교의 진리에 깊이 심취했다. 또한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 없다고 당당히 밝혔다.

허균은 1603년에 명주에 머물며 단오제를 보고 기록을 남겼다. 김유신은 명주에서 공부하면서 대관령 산신에게 무예를 배웠고, 선지사에서 칼을 만들어 삼국을 통일했다. 그는 죽어서 강릉의 수호신,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대관령 산신에게 무술을 배웠다는 것은 삼국시대 이전에도 산악신앙의 숭배가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삼국유사에는 석탈해가 죽어 토함산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도 전해 신라인의 산신신앙의 단면을 알 수 있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국사성황신은 산신과 마찬가지로 언제 어떻게 자리를 잡은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강릉 지역에서는 신라 고승 범일이 국사성황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범일 스님을 대관령 성황으로 밝힌 기록은 1931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 강릉군대관령 새신부분에 "대관령에는 한 개의 성황이 있는데, 즉 범일국사로서 강릉에서 출생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국사성황인 범일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까지 활동한 고승이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 출생으로 탄생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처녀가 해가 떠 있는 샘물을 마시고 태기가 있었고 아이를 낳았다.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이 두려워 뒷산 학바위에 버렸으나, 학이 보살펴 기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 키웠다. 국사는 비범한 외모와 뛰어난 학문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출가하여 신라 말에 국사가 되어 이름을 떨쳤다. 또한 죽어서 대관령 서낭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범일의 신이한 탄생과 모험 그리고 위인이 되고, 죽어서 신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영웅담처럼 차례로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범일을 뜰 범(), 해일()자로 쓰기도 하는데, 이는 신화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원명은 범일(梵日)이며, 국사성황이 바로 신라 고승 범일국사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범일국사의 다른 모습

 

대관령 재궁골로 가는 길은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은 아니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진부와 횡계를 거쳐 강릉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중간 기착지인 횡계에서 내려야 한다. 지금은 복선화되어 새로 개통된 고속도로 덕에 2시간 정도면 도착이 가능하다. 횡계 지역은 시내버스가 드물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대절하여 재궁골로 이동했다. 대관령 휴게소로가는 구 도로를 이용하여 약 6KM 정도 가다, 대관령 목장을 지나 좌측으로 접어들면 재궁골이 자리한다. 대관령 능경봉에서 선자령으로 이어지는 능선 아래 계곡이다. 재궁골은 이 계곡의 동쪽 숲속의 빈터에 위치한 아늑한 곳에 국사성황 범일국사를 모신 성황사, 산신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당이 있고, 기도처인 칠성당과 샘물 용정이 모여 있어 '신터'라 불리운다.

주차장을 지나 관리동 좌측으로 성황사가 보이고, 그 뒤로 산신각, 용정, 칠성목() 이 자리한다. 때마침 단오를 맞아 성황사에서는 신주굿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자인 박수 무당이 조상신들에게 치성을 들이는 여인네를 성황신의 조력으로 재복을 비는 무속 신앙을 펼치고 있었다.

굿 판 너머로 보이는 성황신의 탱화는 기자가 상상했던 범일국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양옆으로 호랑이의 호위를 받으며 부관이 고삐를 쥔 백마를 탄 무관의 모습이다. 한손에는 활까지 쥐고 있다. 분명히 불교의 고승대덕의 모습은 아니다. 이는 무속 신앙인들이 바라는 모습으로 그형상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대관령의 성황은 인자한 고승의 모습보다는 나그네와 마을을 지켜주는 무장의 모습이기를 염원한 탓이라 추정된다.

성황당 뒤편으로 자리한 산신각에서도 나의 예상은 그대로 빗나갔다. 김유신 장군의 모습을 상상하고 전각 앞에 다다르니, 여느 산신각과 같이 긴 수염에 상투를 틀고 한손에는 부채를 쥐었다. 동자의 선도 복숭아 공양을 받으며 옆으로 호랑이를 옆에 두었다. 이 탱화 역시 산신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변한 김유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부채다.

 

유교와 무교의 절묘한 만남

 

 

 

강릉단오제의 가장 재미있는 상황은 재궁골 성황당 앞에서 벌어진다. 불교나 무속을 사이비로 치부했던 유교식 제사가 단오를 앞두고 이곳 성황신인 범일국사에게 올려 진다. 유교식제사에 이어 무교식 굿 판이 벌어지는데, 상극의 이념을 가진 두 제의가 서로 충돌할 것 같지만 재궁골에서는 이를 모두 포용하는 자리를 펼친다.

단오제의 제례는 신주빚기부터 산신제, 성황제, 봉안제, 영신제, 네번의 조전제와 마지막으로 송신제 까지 9번의 제례를 지낸다. 제례를 지내는 형식은 모두 같은 절차에 의해 진행되고 신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제의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진다.

강릉 단오제는 산행길의 안전이나, 바다를 접한 동해안 주민들의 풍어, 집안의 태평등을 기원하는 제의와 민속놀이의 전통 문화 요소들이 잘 보전되어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재궁골 역시 강원도 평창군에 속하지만 강릉시가 지역을 임대하여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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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21

호국불교와 산신신앙의 원당 도선사와 삼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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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불교와 산신신앙의 원당 도선사와 삼천사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우리 가까이 있는 가장 웅장하고 그 산세가 깊다. 예로부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 오악(五嶽)에 포함되는 명산이다. 세 봉우리인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가 큰 삼각형으로 놓여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삼각산(三角山) 또는 삼봉산(三峰山), 화산(華山), 부아악(負兒岳) 등으로도 불린다. 고려시대부터 삼각산이라고 하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북한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울의 진산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중생대 말기에 지층에 파고든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표면에 드러났다가 다시 풍화작용을 받아 험준한 바위산이 되었다.

 

무학대사가 서울을 내려다 본자리?

 

주봉인 백운대에 오르면 서울 시내와 근교가 한눈에 들어오고, 맑은 날에는 강화도·영종도 등 황해의 섬도 보인다. 인수봉은 암벽 등반 코스로 인기가 높다. 봉우리 북쪽에 튀어나온 바위가 마치 아이를 업은 모양 같다고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자리잡고 살 만한 땅을 고를 때 이 봉우리에 올라 서울의 지세를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백운대의 남쪽에 있는 만경대는 주변 경관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예로부터 국망봉이라 불렸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지를 정할 때 여기에 올라서 내려다보고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외에도 노적봉(716m)·영봉(604m)·비봉(碑峰:560m)·문수봉(716m)·보현봉(700m) 등 이름난 봉우리만도 40여 개나 된다.

조선시대 때 수도의 방어를 담당했던 북한산성,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 터를 비롯해 유명한 북한 이궁지(離宮址), 진관사·문수암·태고사·원효암·상운사(祥雲寺도선사(道詵寺승가사·화계사 등 많은 사찰과 문화유적이 산재한다. 서울 외곽에 있어 연중 등산객과 일반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83년 도봉산과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오악사상

···북 및 중앙지역을 대표하는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북한산)을 일컫는다. 오악의 개념은 중국의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비롯되었으며, 오악에는 나라의 수호신(守護神)이 거처한다고 믿어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여겨 왔다. 신라 때에는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과 부악(父岳:지금의 팔공산)을 오악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고, 고려 때에는 덕적산(德積山) ·백악(白岳) ·목멱산(木蠶山:지금의 남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특히 백두산은 일찍부터 한민족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종주산(宗主山)으로서 조선 영조 때 망덕산(望德山)에 백두산단을 만들어 망제(望祭)을 지낸 일이 있다.

 

 

 

 

국가기도도량 도선사(道詵寺)

 

 

신라 경문왕 2862년 도선(道詵)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도선은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防番보초 임무)을 서기도 하였다. 1863(철종 14) 김좌근(金左根)의 시주로 중수하고 칠성각(七星閣)을 신축하였으며, 1887(고종 24)에는 임준(任準)이 오층탑을 건립하고, 그 속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였다.

1903년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904년 국가기원도량(國家祈願道場)으로 지정받았다. 1916년 도선사의 중흥주인 청담(靑潭)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당시 박정희 대통령 및 육영수 여사 등의 시주로 도량을 중수하였다. 이어서 호국참회원을 건립하고 불교의 평화 염원에 입각한 실천불교와 생활불교운동을 전개하였다.

호국참회원은 19771115일에 완공한 종합 포교센터이다. 지하 1, 지상 3, 총 면적 1,000평의 콘크리트 한옥식 건물로, 법당·영사실·도서실·신앙상담실·수련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문화재로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석불이 있다.

 

 

 

'산신이 보좌를 튼 절' 삼천사

도선사와는 산의 반대편에 위치한 진관외동의 삼천사는신라 문무왕 원년인 661년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 1481(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한때는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 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1592(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진영이 중창하였다.

1950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0년에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특히 산령각은 정면 2, 측면 2칸의 전통 건축양식인 맞배지붕으로 을해년에 개축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산신과 호랑이를 그린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는데 산신은 산의 영()으로 산을 지키며 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하는 신으로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산의 주인으로서 늘 가람의 뒤쪽에 자리하며 불법을 수호(守護)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좌우에 각각 독성탱화와 칠성탱화를 봉안하고 있는데 다른 사찰과는 달리 나무에 새긴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삼각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런 이유에서 삼천사를 '산신이 보좌를 튼 절'로 부르기도 한다. 영험한 곳으로 소문이 나 많은 기도객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있다.

편집 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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