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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6. 6. 9. 12:27

남은 육신 마져도 다 내어주고 가신 진정한 수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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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육신 마져도 다 내어주고 가신 진정한 수행자

심인행 전수 제16주기 추선불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학장 이홍식)은 매년 4월 세 번째 목요일에 의학교육과 발전을 위해 헌체(獻體)한 고인들의 뜻을 추모하는 감은제(感恩祭)’를 개최한다.

올해 행사에는 의과대학생과 교직원, 유가족 등 300여 명이 참석해 작년 4월부터 올해 4월까지 의학발전을 위해 시신을 기증한 73분의 숭고한 뜻을 추모했다. 개회식으로 시작된 이번 감은제는 의과대학장을 비롯해 유가족 대표, 학생 대표의 추모사와 함께 유가족, 학생들의 단체 헌화와 묵념으로 이어졌다.

이홍식 학장은 추모사에서 의학 실습 교육과 연구 발전을 위해 시신 기증이라는 고귀한 결정을 내려주신 기증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감사와 추모의 말씀을 전한다", “기증자분들의 헌신과 생명의 존엄함을 늘 되새기며 바른 인술을 펼치는 참된 의사를 양성하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감은제는 우리 종단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종단의 입교개종과 더불어 25년간 중생교화의 대업을 수행하시고 홀연히 열반에 드시는 순간까지 법체 마져 중생을 위해 주고 가신 심인행 전수님 때문이다. 지난 2000년 열반에 드신 스승님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법체를 고려대 의과대학 학생들에게 헌체했다. 살아계시면 병인생으로 올해 91세를 맞았을 것이다. "빈몸으로 왔다 부처님의 법을 만나 진언염송 정진 한것 만으로도 할것은 다했다."고 담담히 열반에 드셨다고 심인행 전수님의 장녀인 실지사 신정회장인 인명화(정경자) 보살은 회고 했다.

 

심인행 스승님은 경주 출생으로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일본 기후현 무의 고등 여학교를 1943년에 졸업하고 해방과 더불어 고국으로 돌아 왔다. 조용한 성겻으로 요리와 바느질을 잘하시는 한마디로 현모양처셨다. 창종 초기 종단의 법의가 완전히 제정되기 전에는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손수 스승님들의 법의를 지어 공양했다. 원정 대성사의 법의는 당연 심인행 전수님의 정성으로 지어졌다.

 

기로스승 선도원 전수님은 "조용한 성격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교도들의 집을 방문하고, 신행 상담을 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합니다."며 자상한 말로 교화에 매진하시던 모습을 추억했다. 심인행 스승님은 특히 만두를 잘 빚었다. 스승님이 만두를 빚는날은 교도들의 잔칫날이었다. 모두를 위해 정성으로 맛을 낸 탓이다.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마친신 심인행 스승님은 서예에도 조예가 남달랐다. 한글과 한문을 모르는 교도들을 위해 직접 가르친일은 아직도 교도들 사이에 유명한 이야기다.

 

521일 심인행 전수님의 제16주기 추선불사가 봉행된 실지사 서원당에는 스승님의인도로 총지종에 입교한 교도들과 유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실지사 주교 법우 정사의 집공으로 봉행된 불사에서 교도들은 스승님의 교화와 공덕으로 실지사가 발전하고,  스승님의 극락왕생을 지극히 서원했다. 법우 정사는 추도사에서 "생전에 교화를 위해 불철주야 가리지 않고 불편하신 몸으로 헌신하시고,늘 자비로운 미소로 제자들을 배려하셨습니다. 끝내는 열반하시면서 스승님의 법체를 우리나라 의학 발전을 위해 연구용으로 기증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스승님의 일생은 희생과 헌신과 베품으로 일관 하셨습니다."며 스승님의 법을을 추도했다.

심인행전수님은 197310월 부터 실지사 교화를 시작으로 중앙종의회 의원, 통리원 사회부장 등을 역임하고 종단 발전에 기여하고 총기 29521일 열반에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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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정진은 행복의 문을 여는 지름길

 

실지사 부림회 관득 손기성 회장

 

실지사는 각자님들의 사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사원 환경 정리에서부터 법회 준비와 주차까지 각자님들의 손길이 안가는 곳이 없다. 총지종 신행단체 중 가장 활동적인 실지사 부림회를 이끄는 주인공이 바로 관득 손기성 각자다.

항상 웃음 뛴 얼굴의 관득 손기성 각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시작한 진언 수행은 평생 내 가정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생활 자체였다.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묵묵히 걸어온 손기성 각자의 삶과 수행을 소개한다.

 

밀교의 진언 염송 수행을 먼저 시작하신 분은 관득 각자님의 모친 행원심 조태순 보살이다.. 올해로 88세를 맞은 노 보살님은 길고 어두웠던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각자님의 부친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부친은 민족의 큰 아픔인 6.25를 만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어 병상에 눕는다. 그 어려운 시기를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이겨내려 각자님의 모친은 진각종에 귀의하고 성심으로 진언수행에 매진했다. 물론 어머님이 사원에 나갈 때면 손기성 각자는 항상 같이 다녔다. 그러나 부친의 병환은 날로 깊어갔고, 가정 형편은 더 어려워 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충청 제일의 명문인 대전중학교 당당히 합격한 각자님은 가정 형편을 생각해 진학을 포기한다.

 

각자님은 당시 대전에서 최고의 양복 기술을 가진 외삼촌을 찾아간다. 일본에서 양복 기술을 배운 외삼촌은 어린 조카의 청을 받아들여 조수로 일을 시킨다. 하지만 어린나이에 양복 기술은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 물었다. 가족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는 자신의 바램을 지키기 위해서 하루하루 고된 노동을 견디었다. 18살이 되는 해 아버지가 오랜 병환 끝에 돌아가신다. 상을 치르고 출근 하니 외삼촌은 재봉틀 한 대를 가리키며 이제부터 내가 쓸 미싱이다.”말했다. 5년 만에 정식 기술자가 된 것이다. 그동안 매를 맞으며 배웠던 기술을 최고의 양복 기술자인 외삼촌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관득 각자는 모두를 다 얻은 듯 했다. 조금씩 내일을 위해 저축하고 가족을 부양하면서 바쁜 일상을 보낸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학교에 진학하지 않더라도 준비는 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서울통신강의록구해 독학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꾸준히 진언염송을 하고, 가슴속에 차오르는 부처님의 가지력을 느낀다.

 

양복기술자로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노총각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됐다. 29살 되던 해 주위 사람의 소개로 평생 수행과 생활의 동반자인 박순임 무량수 보살님을 만나 결혼한다. 경상도 상주 출신의 보살님은 대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경주로 신혼여행을 갔다. 첫 날밤, 각자님은 새색시에게 옴마니반메훔육자진언과 비로자나불 수인을 가르친다. 평생 수행을 같이 하자는 뜻이다. 무량수 보살님은 어리둥절해 하며 따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날이 진언행자로서 새로 태어나는 날이었다. 몇 개월의 신혼생활을 대전에서 보내고, 관득 각자는 서울로 갈 것을 결심했다. 좀 더 큰 곳에서 새로운 터전을 닦아보고 싶었다. 새색시를 데리고 서울로 온 젊은 진언행자 부부는 쌍문동에 사글세를 얻어 새 인생을 시작한다.

 

부부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직장 생활부터 시작해 작은 공장도 운영해보고, 모든 일을 같이 했다. 어느덧 자식들도 하나 둘 태어나 12녀가 태어났다. 비록 12번의 이사를 다녔지만 내집도 장만하고 아이들 대학 공부도 마쳤다. 장녀와 차녀는 배필을 만나 혼사를 치르고, 이젠 엄마가 되었다. 딸 들은 시집을 갔지만 가까운 곳에 있어 자주 모인다. 주말에 오는 날에는 온 가족이 실지사 자성일 법회에 참석한다. 자녀들은 자라면서 부모님이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다고 한다. 부처님 같은 자애로운 마음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큰 병 없이 잘 자라 사회의 일원이 되고, 결혼하여 부모가 된 자녀들이 관득 각자님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불자들의 수행 방법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팔정도(八正道). 관득 각자의 인생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생활이 바로 팔정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명, 정정 어느 하나 행하지 않은 것이 없다. 팔정도의 수행을 바탕으로 매일 진언염송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이룬 삶이라 겸손히 말하는 관득 각자는 매일 매일 변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지만, 수행이 쌓이고 쌓이면 처음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며 작은 공덕이 모여 큰 복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기자는 관득 각자의 인터뷰를 마치며 초등학교 바른생활부터 대학과정의 윤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모범적 인간상이 바로 저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든 불자들이 저리 된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될까. 팔정도의 삶과 꾸준한 수행은 우리의 삶을 편안한고 윤택하게 해준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내 불성을 일깨우는 삶이다.

실지사=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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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김기자가 가다

 

사원은 우리집 모두가 한가족 실지사 각자 신행단체 부림회

 

자발적인 결성

 

1227일 실지사(주교:법우 정사) 자성일 법회가 끝나자 공양간은 분주했다. 10여 명의 각자님들이 함께 들어와 공양을 시작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 안부를 물으며 공양하는 각자님들은 다름 아닌 실지사 신행단체 부림회각자님들이다. 이 날은 부림회의 정기총회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지난 일 년 동안의 살림살이를 회원들에게 공개하고, 내년의 주요활동 계획을 잡는 자리다.

부림회회장 관득 각자는 총지종 입교개종(立敎開宗) 당시 원정 대성사의 가르침을 따라 진각종에서 부터 신행을 이어온 교도다. 2014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의기투합한 실지사 각자님들은 본격적인 신행단체 부림회를 결성한다. 구성원은 최고령인 대성(정태우)각자님을 비롯한 총 9명에 실지사 주교 법우정사를 명예회원으로 총 10명이다. 정식 가입은 안했지만 사원에서 행사가 있거나 환경을 정리하는 일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각자님들도 7-8명 더 있다.

 

우리는 형제

 

부림회의 첫 활동은 봉축 연등 만들기와 사원 내외의 연등 설치였다. 회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내 집일처럼 몸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내 가정의 잔치를 준비한다는 기분으로 사원 내외의 청소와 환경정리도 했다. 봉축 연등회에도 참석하여 종단의 연등 행열을 이끌었다. 실지사 교도들도 신명나는 연등 축제를 함께 즐기며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온몸으로 느꼈다.

 

회원들은 새봄을 맞아 신축 실지가 정원을 아름답게 가꿨다, 꽃나무를 심고, 잔디가잘 자라도록 관리했다. 특히 교도들이 언제든지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테라스 공사도 자발적인 기금으로 직접 공사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법계궁을 아름답게 장엄하고, 교도만이 아니라 지나던 이웃 주민도 언제나 들어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자리를 부림회 회원들의 작은 보시로

 

회장 관득(손기성)각자는 실지사는 지난해 기존의 사원을 헐고 신축한 사원입니다. 그 동안은 사원의 구조가 가정집을 개조한 상황이라 수행 환경이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부림회 각자님들은 신축 사원을 전국에서 제일가는 수행도량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언제와도 내 집같이 편안한 분위기와 정통 밀교 도량으로서 장엄함을 증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며 회원들의 자발적인 봉사활동을 설명했다. 또한 이전의 사원에서는 각자님들이 모여 법담을 나누고 서로의 수행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없었습니다. 사원이 신축되면서 각자님들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생겨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법회가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습니다.”며 실지사 신축으로 교도들의 단합과 신행 활동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신행은 어린시절 그 기초가 다져집니다.

역시 실지사의 창건을 함께한 고운(김승원) 각자님은 자재 분의 나이가 올해 44세로 종단 창종 역사와 같다. 간난이가 건장한 성년이 되고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내내 보살님과 각자님은 진언염송과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이루어졌다 했다. 고운 각자님은 하루는 사원에 오기위해 집에서 걸어오고 있는데 삼양동 사거리의 한 교회에서 유치원 아이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예배를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봤습니다. ! 우리 실지사도 저런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가슴 한 켠으로 부러웠습니다.”요즈음의 총지종 교화의 어렵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시대가 바뀐 만큼 교화의 방편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온가족이 함께 와서 영.유아들을 편안히 맡기고 부모들은 정진할 수 있는 방안이 검토 되었으면 합니다. 사위, 며느리, 손자들이 같이 오고 싶어도 마땅히 아이들을 돌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 힘들것이 현실입니다.”라고 자신들의 종교가 자식을 거쳐 손자까지이어 지기를 바랬다.

 

부림회 각자들의 신행담은 바로 총지종의 역사였다. “하루 중에 행복함은 새벽불공 함에 있고, 칠일 중에 행복함은 자성일에 빠짐없이 불공정진 함에 있고, 한 달 중에 행복함은 월초불공 함에 있고, 일 년 중에 행복함은 새해불공 함에 있고, 일평생에 행복함은 평생으로 변함없는 그 종지에 있느니라.”는 종조 원정대성사님의 법설을 믿고 평생을 그대로 실천한 모습을 각자님들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부림회 각자님들은 마지막으로 종단이 힘드는 것은 알지만 유치원부터 초, , 고까지 일관된 종지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있어서면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은 평생을 자신의 가치관을 지배한다고 봅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자란 아이는 평생 불자로서 윤택한 삶을 살아 갈 것입니다.”며 어린이와 청소년 교화에 종단의 힘을 기우려 주기를 당부했다.

 

병신년 새해에는 원숭이처럼 민첩한 부림회 각자님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회원도 더 늘어나고, 이웃과 교도를 위한 봉사 활동과 염송정진에서는 물러남 없는 용맹정진하는 신행단체가 되기를 바란다.

실지사=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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