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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항일독립 문화유산인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문서」, 「국제연맹제출 조일관계사료집」, 「윤동주 친필원고」, 「이육사 친필원고 ‘편복(蝙蝠)’」, 「장효근 일기」 5건과,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1건을 문화재로 등록 했다.



*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문서」(국회도서관 소장)



  이번에 등록 예고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문서」(국회도서관 소장)는 3.1운동 이후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 1945년 8월 17일까지 개최한 정기회와 임시회 회의록 등이 포함된 자료이다. 임시의정원 의장을 네 차례 역임한 홍진(1877~1946)이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1일 환국할 때 국내로 가지고 들어왔고, 홍진이 별세한 이후 유족들이 보관하다 1967년 국회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이 문서는 임시의정원이 생산한 기록물 중 현존하는 귀중한 원본 자료로, 임시의정원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활동내역과 변천 과정 등을 알 수 있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국제연맹제출 조일관계사료집」(독립기념관 소장)


  「국제연맹제출 조일관계사료집」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편찬한 최초이자 유일한 역사서로, 조선총독부 등에서 발간하는 일제의 선전물이 식민통치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국제연맹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책은 한일관계사를 삼국 시대부터 연대별로 다루어 일본의 침략성을 실증하고, 경술국치 이후 식민탄압의 잔혹성과 3.1운동의 원인과 전개과정 등을 포함하여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100질이 만들어졌으나, 현재 국내에서 완질로 전하는 것은 독립기념관 소장본이 유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윤동주 친필원고」(연세대학교 학술원 소장)


  「윤동주 친필원고」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유일한 친필원고이다. 개작(改作) 등을 포함하여 시 144편과 산문 4편이 쓰여 있는 「윤동주 친필원고」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와 같이 개별 원고를 하나로 묶은 시집 3책과 산문집 1책, 낱장 원고 등으로 되어있다. 윤동주의 누이동생인 윤혜원과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인 강처중,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유족의 손을 거쳐 2013년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기증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육사 친필원고 ‘편복(蝙蝠)’」(안동 이육사 문학관 소장)


  「이육사 친필원고 ‘편복(蝙蝠)’」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이원록, 1904 ~1944)가 남긴 시 ‘편복’의 친필원고로, 동굴에 매달려 살아가는 박쥐에 빗대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현실을 형상화하였다. 당시 ‘편복’은 일제의 사전 검열에 걸려 발표되지 못했으나, 해방 후인 1956년 ‘육사시집’에 처음 수록되어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육사의 시 중에서 가장 중량 있고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편복’의 친필원고는 유족들이 소장해오다 경북 안동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에 기증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追敍:돌아가신 후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을 줌)하였다.

 

* 「장효근 일기」(독립기념관 소장)


  「장효근 일기」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장효근(1867~1946)이 1916년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거의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한 한문체의 일기이다. 장효근은 제국신문(帝國新聞), 만세보(萬歲報) 등의 창간과 발행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고, 3.1운동이 추진되던 1919년 2월 27일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 2만여 매를 인쇄하여 배포한 혐의로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유족들에 의해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그의 일기에는 일제강점기 사회상과 국내외 정세, 독립운동에 대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소유=부산광역시 남구청)


 함께 등록이 예고된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소유=부산광역시 남구청)은 해방 이후 귀환 동포와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밀려드는 피란민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위해 ‘소(牛) 막사(幕舍)’를 주거시설로 변용(變容)한 것으로 당시 피난민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산업화 시기 인근 지역에 조성된 공장, 항만 등으로 인해 이곳으로 유입된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으로서 오늘날까지도 그 기능을 유지해 오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20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선열들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항일독립 문화유산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서대문형무소 등 상징적인 항일독립 문화유산에 대한 종합 정비를 중점 추진하여 그 가치가 국민 곁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문화유산의 보존‧활용체계를 대폭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등록 예고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문서」등 6건에 대해 30일간의 등록 예고 기간 중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등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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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6:00

안동 봉정사 삼성각과 제비원 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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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화엄 밀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봉정사 삼성각

 

 

 

 

 

 

안동. 불법의 향기를 품은 국화 같은 고장

 

안동하면 소수서원, 양반 마을, 하회탈, 간 고등어 등 여러 단어들이 떠오른다. 몇 해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왔을 때 ,하회마을 류성룡의 종가와 봉정사를 방문했다. 하회마을은(중요민속자료 제122)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유학이 성행하고, 양반가의 명망으로 이름이 높은 안동에는 의의로 많은 불교문화재가 남아있다. 고려시대 전탑의 웅장한 모습을 전해주는 신세동 전탑을 비롯해 살아있는 불교건축 박물관인 봉정사, 거대한 통 바위 위에 불두 만 조성해 얻은 제비원 미륵불 등 발길 닫는 곳 마다 불교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봉정사는 소백산 자락의 천등산에 자리한 전통 사찰로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천등산 자락은 국화 재배로 유명하다. 사찰이 위치한 서후면은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에 국화 축제를 열고, 전국의 불자와 관광객들에게 국화의 진한 향기를 선사한다.

 

천상의 선녀도 감복한 불퇴전의 수행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창건하신 사찰이다. 스님이 한창 수행 정진 할 때, 산세 좋기로 유명한 대망산(지금의 천등산) 기슭의 바위굴에서 공부했다. 스님의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천상의 선녀가 바위굴을 찾아 하늘에서 가져온 등불로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때부터 스님이 공부하던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하고, 대망산이라 불리던 산의 이름도 천등산'이라 부른다. 능인스님은 이후 더욱 수행에 매진하여 얻은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떨어져 산문을 개산한다. 스님이 말린 종이 봉황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봉정사라는 이름을 짖는다.

봉정사는 창건 설화만큼 오래 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다름 아닌 봉정사 극락전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고,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본존은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한다.

 

천등산을 감싼 진언의 기운

 

대망산이었던 천등산은 봉정사 극락보전 왼편으로 삼성각을 두고 있다. 여느 삼성각과 마찬가지지만, 외전으로 자리하는 터라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단칸집이다. 그러나 출입구 양쪽에 벽을 설치하여 언 듯 보기에는 단칸이지만 세 칸으로 보이는 양식이다. 산신, 칠성, 독성을 나란히 봉안한 전각은 천등을 이어나가는 외호신으로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산신도와 산신상을 함께 모셨는데, 지나치게 커 보이는 소나무는 다른 지역의 산신도의 양식과 조금 다른 특별함을 보인다. 산신각을 천천히 살피던 중 지붕아래 보에서 범자 옴자와 마자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사찰의 산신각, 삼성각을 취재했지만 범자가 보나, 도리에 새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천등사 대웅전의 우물 천정에서도 관세음보살 육자진언을 만났다. 정확한 사료의 분석과 검토를 해야 밝혀지겠지만,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의 화엄종의 수 사찰인 부석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진 화엄 밀교에 그 연원을 추정해 본다. 또한 11세기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13세기 경에 널리 퍼진 밀교 경전 대승장엄보왕경의 육자진언과 성음구제사상의 영향으로 밀교적 화엄사상이 고려 말기에 이 지역에도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과 성주풀이

 

서후면 봉정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비원 미륵 석불은 보물 제116호로 자연암벽에 불신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는 따로 제작하여 올려놓은 거구의 불상이다. 미소를 띤 풍만한 얼굴은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붉게 채색된 두터운 입술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이다. 삼도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새겨 장식하였다.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 주름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불상의 발아래 단판연화문으로 음각으로 새겼다.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 조각 양식으로 보아 11세기 무렵, 고려 마애불의 유행고 함께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음각으로 새겨진 수인에는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이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 마애불의 이름은 제비원 미륵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 불교문화의 단면을 결정적인 단서이다. 자연거석을 하나의 석상 보고자 하는 고려 마애불의 특징적 형태이다. 또한 불상의 일부를 입체적으로 표현된 양식은 통일 신라의 조각 기법과 고려의 표현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사이의 정치적 변동과 맞물려 미륵신앙이 점차 고개를 들었다. 특히 하층민들의 경우 종교성이 강한 미륵신앙에 새로운 희망을 걸게 된다. 제비원 미륵불은 고려 건국의 복잡한 정세를 타고 변모하는 민중불교의 성격을 가지는 미륵신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석불상이라 볼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은 오랜 민속신앙인 성주신앙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가옥을 짓거나 이사를 하면 성주신에게 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성주신은 가택신을 말하는데 선조들은 성주신이 가옥을 지키고, 가옥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바로 그 민속 신앙의 그 발원처가 안동의 제비원 미륵 부처님이다. 성주고사 때 부른 성주풀이에는 성주의 근본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에 솔씨 받아...”라는 가사에 나오듯 이곳 제비원 미륵이 바로 우리나라 모든 가택을 지켜주는 성주신임을 확인해 준다. 제비원의 미륵 부처님은 성주신으로 화현하여 오랜 동안 우리의 집안을 지켜온 것이다. 안동=김종열 기자.

 

 

-11세기 화엄 밀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봉정사 삼성각

 

안동. 불법의 향기를 품은 국화 같은 고장

 

안동하면 소수서원, 양반 마을, 하회탈, 간 고등어 등 여러 단어들이 떠오른다. 몇 해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왔을 때 ,하회마을 류성룡의 종가와 봉정사를 방문했다. 하회마을은(중요민속자료 제122)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유학이 성행하고, 양반가의 명망으로 이름이 높은 안동에는 의의로 많은 불교문화재가 남아있다. 고려시대 전탑의 웅장한 모습을 전해주는 신세동 전탑을 비롯해 살아있는 불교건축 박물관인 봉정사, 거대한 통 바위 위에 불두 만 조성해 얻은 제비원 미륵불 등 발길 닫는 곳 마다 불교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봉정사는 소백산 자락의 천등산에 자리한 전통 사찰로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천등산 자락은 국화 재배로 유명하다. 사찰이 위치한 서후면은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에 국화 축제를 열고, 전국의 불자와 관광객들에게 국화의 진한 향기를 선사한다.

 

천상의 선녀도 감복한 불퇴전의 수행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창건하신 사찰이다. 스님이 한창 수행 정진 할 때, 산세 좋기로 유명한 대망산(지금의 천등산) 기슭의 바위굴에서 공부했다. 스님의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천상의 선녀가 바위굴을 찾아 하늘에서 가져온 등불로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때부터 스님이 공부하던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하고, 대망산이라 불리던 산의 이름도 천등산'이라 부른다. 능인스님은 이후 더욱 수행에 매진하여 얻은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떨어져 산문을 개산한다. 스님이 말린 종이 봉황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봉정사라는 이름을 짖는다.

봉정사는 창건 설화만큼 오래 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다름 아닌 봉정사 극락전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고,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본존은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한다.

 

천등산을 감싼 진언의 기운

 

대망산이었던 천등산은 봉정사 극락보전 왼편으로 삼성각을 두고 있다. 여느 삼성각과 마찬가지지만, 외전으로 자리하는 터라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단칸집이다. 그러나 출입구 양쪽에 벽을 설치하여 언 듯 보기에는 단칸이지만 세 칸으로 보이는 양식이다. 산신, 칠성, 독성을 나란히 봉안한 전각은 천등을 이어나가는 외호신으로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산신도와 산신상을 함께 모셨는데, 지나치게 커 보이는 소나무는 다른 지역의 산신도의 양식과 조금 다른 특별함을 보인다. 산신각을 천천히 살피던 중 지붕아래 보에서 범자 옴자와 마자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사찰의 산신각, 삼성각을 취재했지만 범자가 보나, 도리에 새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천등사 대웅전의 우물 천정에서도 관세음보살 육자진언을 만났다. 정확한 사료의 분석과 검토를 해야 밝혀지겠지만,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의 화엄종의 수 사찰인 부석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진 화엄 밀교에 그 연원을 추정해 본다. 또한 11세기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13세기 경에 널리 퍼진 밀교 경전 대승장엄보왕경의 육자진언과 성음구제사상의 영향으로 밀교적 화엄사상이 고려 말기에 이 지역에도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과 성주풀이

 

서후면 봉정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비원 미륵 석불은 보물 제116호로 자연암벽에 불신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는 따로 제작하여 올려놓은 거구의 불상이다. 미소를 띤 풍만한 얼굴은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붉게 채색된 두터운 입술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이다. 삼도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새겨 장식하였다.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 주름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불상의 발아래 단판연화문으로 음각으로 새겼다.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 조각 양식으로 보아 11세기 무렵, 고려 마애불의 유행고 함께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음각으로 새겨진 수인에는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이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 마애불의 이름은 제비원 미륵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 불교문화의 단면을 결정적인 단서이다. 자연거석을 하나의 석상 보고자 하는 고려 마애불의 특징적 형태이다. 또한 불상의 일부를 입체적으로 표현된 양식은 통일 신라의 조각 기법과 고려의 표현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사이의 정치적 변동과 맞물려 미륵신앙이 점차 고개를 들었다. 특히 하층민들의 경우 종교성이 강한 미륵신앙에 새로운 희망을 걸게 된다. 제비원 미륵불은 고려 건국의 복잡한 정세를 타고 변모하는 민중불교의 성격을 가지는 미륵신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석불상이라 볼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은 오랜 민속신앙인 성주신앙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가옥을 짓거나 이사를 하면 성주신에게 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성주신은 가택신을 말하는데 선조들은 성주신이 가옥을 지키고, 가옥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바로 그 민속 신앙의 그 발원처가 안동의 제비원 미륵 부처님이다. 성주고사 때 부른 성주풀이에는 성주의 근본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에 솔씨 받아...”라는 가사에 나오듯 이곳 제비원 미륵이 바로 우리나라 모든 가택을 지켜주는 성주신임을 확인해 준다. 제비원의 미륵 부처님은 성주신으로 화현하여 오랜 동안 우리의 집안을 지켜온 것이다. 안동=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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