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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불교신문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22. 11. 15. 06:25

문화재청. '윷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신규종목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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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대표 전통 놀이문화 가치 인정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윷놀이’를 신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윷놀이’는 양편으로 나뉘어 윷가락 4개를 던져, 윷가락이 엎어지고 젖혀진 상태에 따라 윷판의 모든 말을 목적지에 먼저 도달시키는 편이 이기는 놀이로, 정초(正初)부터 정월대보름까지 가족 및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전승·유지되어 왔다. 또한, 산업화·도시화로 급격히 와해되는 사회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단절 없이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가치를 담은 대표적인 전통 놀이문화로 자리매김해왔다. 
  
  역사문헌에서 ‘윷’의 유래와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문헌에서는 윷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용어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윷을 ‘저포(樗蒲)’와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혼용하여 지칭하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초기에는 윷놀이에 해당하는 ‘사희(柶戲)’라는 용어가 나타났고, 조선시대 중·후기에는 ‘척사(擲柶)’라는 용어가 나타나 일제강점기와 현대에까지 널리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 저포(樗蒲):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그 사위로 승부를 다투는 백제 시대의 놀이

  윷놀이는 특히 조선시대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문표(金文豹, 1568~1608)는 윷판의 상징과 말의 움직임을 연구하여 「중경지(中京誌)」에 ‘사도설(柶圖說)’을 기술하였고,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사희변증설(柶戲辨證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심익운(沈翼雲, 1734∼?)은 「강천각소하록(江天閣銷夏錄)」의 ‘사희경(柶戲經)’에서 윷가락․윷판은 물론 놀이법까지 자세히 기술하였는데, 이러한 다양한 역사문헌을 통해 윷놀이의 학술성이 매우 크고, 분명하며, 그 연구의 가치가 무궁무진함을 알 수 있다. 
 
  윷놀이는 우리 민족의 우주관과 천문관을 바탕으로 음(陰)과 양(陽), 천체의 28수 등 형식의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놀이의 방식이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윷놀이와 유사한 판놀이(보드게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놀이도구․놀이판․진행방식에서 볼 때 다른 판놀이에 비해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윷가락의 다양한 지역적 분포(가락윷·종지윷 등), 윷판 없이 말로만 노는 건궁윷놀이 등 윷판의 다양한 형태, 놀이방법의 변형 등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여지가 높고, 현재에도 인터넷과 이동통신을 통해 다양한 게임화가 이루어지는 등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도 유연하게 전승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맹인윷놀이의 전승 사실을 통해 사회적 요구에 따라 다양성과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는 윷놀이의 특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에도 연초부터 정월대보름까지의 기간 동안 마을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척사대회를 개최하는 등 지속가능성이 매우 높고, 다양한 전승활성화가 가능하며, 운(運)에 기대는 운놀이라는 특성과 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우의 수(끗수)를 활용하는 가변성의 특성, 직관적 놀이 구성으로 배우기 쉬운 특성, 주변 상황에 맞게 열린 놀이의 특성 등을 지니고 있어 미래에도 활발하게 전승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윷놀이’는 ▲ 오랜 역사를 가지고 한반도 내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하여 관련 역사적 기록이 풍부하게 확인되는 점, ▲ 윷판의 형성과 윷가락 사위를 나타내는 ‘도·개·걸·윷·모’에 대한 상징성 등 학술 연구 주제로서 활용도가 높은 점, ▲ 가족 및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단절 없이 전승이 지속·유지되고 있는 점 등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았다. 

  다만, ‘윷놀이’는 한반도 전역에서 온 국민이 전승·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이미 지정된 ‘김치 담그기’, ‘장 담그기’ 등과 같이 특정 보유자와 보유단체는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종목으로 지정했다.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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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지정 제2000호에 '김홍도 필 삼공불환도' 지정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진도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와 「김홍도 필 삼공불환도」 등 조선 시대 회화와 불교 조각, 서책 등 4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특히 보물 지정호수가 드디어 2000호를 돌파했다. 이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문화재청은 1962년 12월에 서울 숭례문(국보 제1호) 등 116건을 국보로, 1963년 1월에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 등 423건을 보물로 일괄 지정한 이후 현재까지 총 336건의 국보와 총 2,132건의 보물을 지정했다.

 
진도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이번에 지정된 불교문화재인 보물 제1998호 「진도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珍島 雙溪寺 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은 17세기 중엽 전라‧경상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조각가 희장(熙壯)을 중심으로
총 9명의 조각승이 공동으로 참여해 1665년(현종 6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가운데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각 1구의 보살상으로 구성된 삼존(三尊) 형식이다.삼존의 보존 상태와 구성 등이 조성 당시의 모습을 거의 완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복장(腹藏) 유물 역시 안치 당시의 모습에서 크게 훼손되지 않고 발견되어  17세기 복장법식(腹藏法式) 연구의 중요한 정보이다. 또한, 건장한 신체 표현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어린아이 같은 얼굴 등 희장이 참여한 불상조각의 특징을 엿볼 수 있으며, 제작연대와 제작자, 봉안처(奉安處) 등 조성 과정에 대한 학술 정보를 잘 구비하고 있어 17세기 불교조각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구 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보물 제1999호 「대구 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大邱 桐華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은 높이 2m 이상의 대형 불상조각으로, 17세기에 가장 비중 있게 활동한 조각승인 현진(玄眞)의 작품이다.
좌상의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을 배치하였는데 좌상과 입상이 삼존에 모두 등장한 것은 이 시기 삼존상으로는 드문 구성이다. 관음보살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현진을 중심으로 5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1629년(인조 7년)에 조성한 사실이 밝혀졌다.이 불상은 온화한 얼굴과 무게감 있는 신체 표현 등 현진의 개성을 잘 보여주며, 17세기 전반 목조 불상 중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작품이다. 또한, 조각가, 제작 연대, 봉안사찰과 전각 등에 대한 온전한 내력을 갖추고 있고, 조각승 현진이 제작한 불상 중 유일하게 좌상과 입상으로 구성된 작품이라는 점, 시대적 조형감각이 잘 표현되어 있어 예술적․학술적 가치 등 모든 면에서 17세기를 대표하는 사례이다.

 
김홍도 필 삼공불환도

 

보물 제2000호의 영예를 안은  「김홍도 필 삼공불환도(金弘道 筆 三公不換圖: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삼공(三公)의 높은 벼슬과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로, 송나라 시인 대복고(戴復古)의 시 ‘조대(釣臺)’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는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가 57세 때인 1801년(순조 1년)에 그린 8폭 병풍 그림으로, 1801년 순조의 천연두 완쾌를 기념하여 만든 4점의 병풍 중 한 점이다.
경물을 옆으로 비스듬하게 배치한 사선(斜線) 구도를 활용해 역동감을 주었고, 강을 앞에 두고 산자락에 자리한 큰 기와집과 논밭, 손님치레 중인 주인장, 심부름하는 여인, 일하는 농부, 낚시꾼 등 여러 요소를 짜임새 있게 그려 넣어 전원생활의 한가로움과 정취를 표현하였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인물들의 모습, 실물 그대로를 묘사한 듯한 화풍이 돋보이며, 오랜 작품 생활을 통해 숙련된 자유분방한 필치로 화면 전체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 그림은 중국 고전에 기초해 김홍도 나름으로 조선 백성들의 생활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김홍도 말년의 창작활동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인물, 산수 등 여러 분야에 두루 뛰어났던 그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역작이다.

 
자치통감 권 129- 132

보물 제1281-6호 「자치통감 권129~132(資治通鑑 卷一百二十九~一百三十二)」는 1436년(세종 18년)에 간행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판본 가운데 권129~132에 해당하는 책이다.
처음 간행 당시에는 금속활자인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찍어 총 294권 100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편찬했으나, 이때 인출(印出, 책을 찍어냄)한 책은 아직 전체 권수가 실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자치통감 권129~132’는 인출(印出) 발문이 없으나, 지정된 다른 자치통감과 비교했을 때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에서 편집하고 1436년 주자소에서 간행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에 속한 권129와 권130은 처음 확인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자치통감』의 전체 현황을 파악하고 조선 전기 인쇄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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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영묘사터 출토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慶州 人面文 圓瓦當)」 및 「군위 법주사 괘불도(軍威 法住寺 掛佛圖)」 등 보물지정 예고


사찰 괘불 정밀조사를 통해 새롭게 보물로 지정 예고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군위 법주사 괘불도(軍威 法住寺 掛佛圖)」와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고려 시대 청동북(금고,金鼓) 금속공예품, 조선 시대 고문서 등 6건에 대해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문화재청이 전국 사찰에 소장된 대형 불화(괘불도, 掛佛圖)의 보존관리를 위해 정밀조사 사업을 하면서 문화재적 가치가 새롭게 발굴된 괘불도 3건이 포함됐다.

얼굴무늬 수막새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慶州 人面文 圓瓦當)」는 일제시기 경주 영묘사 터(靈廟寺址, 현재 사적 제15호 흥륜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수막새(원와당, 圓瓦當)이다.  1934년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라는 일본인 의사가 경주의 한 골동상점에서 구입한 뒤 일본으로 반출했으나, 고(故) 박일훈 (전)국립경주박물관장의 끈질긴 노력으로 1972년 10월 국내로 돌아온 환수문화재이다.  와당 제작틀(와범)을 이용해 일률적으로 찍은 일반적인 제작 방식과 달리 손으로 직접 빚은 작품으로, 바탕흙을 채워 가면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든 후 도구를 써서 세부 표현을 마무리한 것이다.  비록 왼쪽 하단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 선이 조화를 이룬 자연스런 모습 등 숙련된 장인의 솜씨가 엿보인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삼국 시대 얼굴무늬 수막새이자 신라인들의 염원과 인간적인 모습을 구현한 듯한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신라의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군위 법주사 괘불도


「군위 법주사 괘불도(軍威 法住寺 掛佛圖)」는 1714년(숙종 40년) 5월 수화승 두초(杜迢) 등 9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완성한 괘불이다. 총 16폭의 비단을 이었고 높이 10m에 달하는 장대한 크기로서, 거대한 화면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두 손을 좌우로 벌려 연꽃을 들고 있는 입상의 여래를 화면 중간에 큼직하게 그렸다.부처임에도 화려한 보관과 장신구를 착용한 보살의 모습으로 구현한 점, 하단에 용왕(龍王)과 용녀(龍女)를 협시보살처럼 배치한 점 등 다른 불화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화면 구성을 시도한 것이 주목된다. 담채(淡彩)기법의 색감과 세밀하고 정교한 필선, 다양한 문양 등이 어우러져 작품의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연꽃을 들고 있는 주존불의 모습은 조선 후기 불화의 새로운 도상(圖像) 연구를 위한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산 대련사 비로자나 괘불도


「예산 대련사 비로자나불 괘불도(禮山 大蓮寺 毘盧遮那佛 掛佛圖)」는 1750년(영조 26년) 축명(笁明), 사혜(思慧) 등 4명의 화승이 조성한 것으로, 세로로 긴 화면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에 배치하고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상하로 그려 오존(五尊) 형식을 취한 구도이다.
일목요연한 구도와 날씬하고 비례가 적당한 인체표현, 붉은색, 하늘색, 분홍색 등 밝고 부드러운 색채의 사용 등은 18세기 전반 충청도 지역 불화 양식을 계승했음을 잘 보여준다. 19세기 이전 조성된 비로자나불 불화는 남아있는 예가 거의 없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주로 석가모니불, 노사나불과 함께 삼신불(三身佛)로 구성된 것이 일반적이다.  이 괘불도는 유례가 드문 오존(五尊)으로 구성된 작품이자 18세기 중엽 충청도 지역의 괘불 제작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조선 후기 불화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尙州 南長寺 靈山會 掛佛圖)」는 야외에서 거행하는 불교의식인 영산재(靈山齋)에 사용된 불화로, 1788년(정조 12년) 조선 후기 대표 불화승인 상겸(尙謙)의 주도로 총 22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 괘불도는 높이 10m가 넘는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본존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주위에 권속을 짜임새 있게 배치하였고 밝고 짙은 채색으로 장식적인 요소가 돋보이는 화면이 특징이다.  명료하고 능숙한 필선으로 대상을 표현하여 격조 있는 품위를 보여주고 있으며, 18세기 후반 경상북도 지역의 대표적인 불화 중 하나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경선사 명 청동북


「‘경선사’명 청동북(‘景禪寺’銘 金鼓)」은 사찰의 일상적 불교 의례에서 사용된 불교의식구(佛敎儀式具)의 한 종류인 청동북(金鼓)으로서, 옆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무인년(戊寅年)’인 1218년(고려 고종 6년) 경 무관 6명이 발원해 경선사(景禪寺)에 봉안하기 위해 만든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청동북은 표면에는 4개의 굵고 가는 동심원을 둘렀고 중앙에는 연꽃 씨를 표현하였으며, 그 주위를 16개의 연화문으로 돌려가며 장식해 화려하고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갖췄다. 고려시대 청동북 중 아래에 공명구가 뚫려 있는 사례 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작품이다.  지금까지 고려 청동북은 뒷면이 뚫려 있는 반자형(飯子形)이 주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옆면에 공명구가 마련된 ‘경선사명 청동북’은 13세기 청동북 중 기년명이 있는 보기 드문 사례이자 독특한 제작기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려 금속공예품 연구에 있어서도 의미가 크다.

장철 정사공신녹권


함께 지정 예고된  「장철 정사공신녹권(張哲 定社功臣錄券)」은 1398년(태조 7년) 11월에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제1차 왕자의 난(1398년)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정사공신 29명 중 한 명인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장철(張哲, 1359∼1399)에게 발급된 녹권(錄券)이다.


문화재청은  「군위 법주사 괘불도」등 6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다.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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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및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일제강점기 발굴된 신라 시대 주요 유물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보물 제455호)’와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비지정)’의 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재검토하여 보물 지정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1967년 6월 21일 보물 제455호로 지정된 ‘태환이식(太鐶耳飾)’은 본래 경주 노서동 출토 금귀걸이로, 한 쌍 중 한 점은 일본에서 환수된(1966.5.28.) 문화재이다. 그러나 경주 출토 ‘황오동 금귀걸이’와 크기, 형태, 공예 기법 등이 매우 유사하여 지정 이후 출간된 자료 등에서는 보물 제455가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로 오랫동안 인식되고 관리되어 왔다.


  하지만, 1967년 지정 당시 보물 제455호는 환수문화재를 지정한 점에 비추어, 현재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로 되어 있는 보물 제455호의 지정 대상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문화재청은 지난 3월 16일, 보물 제455호의 보존관리 방안에 대한 자문회의를 개최한 후 4월 12일 열린 제3차 동산분과 문화재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노서동 금귀걸이와 황오동 금귀걸이에 대한 조사를 통해 지정 가치 재검토를 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1967년 당시 지정과 그 이후 경과 등을 재확인하고 두 지역에서 출토된 귀걸이에 대한 관계전문가의 현지조사, 문화재위원회 검토‧심의 등의 절차를 밟아 문화재적 가치를 재평가할 계획이다.


  앞으로 문화재청은 해당 문화재에 대해 지정‧비지정 문화재 여부를 적극적으로 비교‧검토하여 지정가치를 재평가하고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정‧관리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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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사이드 최신뉴스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8. 4. 23. 11:32

조선 황실 문화의 정수 종묘대제 5월 6일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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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6일 오후 2시 종묘에서

온라인 사전 예약 4.23. 오후 1시 부터


*사진은 지난해 죵묘대제(사진=문화재청)

  문화재청(청장 김종진)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이 공동 주최하고 종묘대제봉행위원회(종묘제례보존회‧종묘제례악보존회)가 주관하는 2018년 종묘대제가 오는 5월 6일 오후 2시 종묘 정전에서 거행된다.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놓은 왕실 사당인 종묘에서 왕이 친히 제향을 올렸던 종묘대제는 유교 절차에 따라 거행되었던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다. 1969년 복원된 이래 매년 개최된 종묘대제는 조선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종묘대제는 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도록 하는 절차, 신을 보내드리는 절차로 진행되며, 제사를 지내는 예법과 예절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의식이기 때문에 엄격하고 장엄하게 진행된다. 종묘제례(국가무형문화재 제56호)와 종묘제례악(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등 왕실의 품격 높은 의례와 음악, 무용이 어우러진 종묘대제는 그 가치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아울러 종묘대제가 열리는 종묘는 '종묘 정전‘(국보 제227호)과 ’종묘 영녕전‘(보물 제821호) 등 한국적인 건축양식의 건물과 공간들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처럼 종묘대제 관람은 우리 문화유산의 정수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올해 종묘대제에는 문화재청장과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을 비롯하여 문화재 관계인사, 주한 각국 대사, 전주이씨 종친, 국내외 관광객 등 약 3만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행사는 영녕전 제향(10:00~12:00)을 시작으로 어가행렬(11:00~12:00, 경복궁 광화문→세종로사거리→종로 1‧2‧3가→종묘)이 진행되며, 오후 2시부터 본 행사인 정전 제향(14:00~16:30)이 거행된다. 영녕전은 오전 9시부터 관람할 수 있고, 본 행사인 정전 제향은 오후 1시부터 입장할 수 있다. 정전 제향 후에는 평소에는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정전 내 신실(神室)도 관람할 수 있다.


  종묘대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제례의 엄숙함을 위해 정전 관람석 일부는 사전 예약제(200명)로 운영하며, 나머지는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관람석을 배정한다. 관람 사전예약은 23일 오후 1시부터 한국문화재재단 누리집(http://www.chf.or.kr)을 통해 네이버 예약관리시스템에 접속하면 된다. 행사 진행과 예약에 관한 내용은 한국문화재재단 활용진흥팀(☎02-2270-1242)으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조선 왕실의례와 악(樂)·무(舞)가 조화된 종합예술을 접할 수 있는 이번 종묘대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우리 전통문화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종묘대제에 깃든 정신과 가치를 올곧이 계승하고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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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서울시(시장 박원순)와 함께 10일 오후 2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광화문 앞 월대’ 등 문화재 발굴‧복원과 해태상의 원위치 이전, 역사광장 조성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하였다.



  월대(月臺, 越臺)는 궁중의 각종 의식 등에 이용되는 넓은 단으로, 경복궁 근정전 등 궁궐 전각과 종묘, 능침 정자각 등에서 볼 수 있다. ‘광화문 앞 월대’는 중요 행사가 있을 때 국왕이 출입하면서 백성과 연결되던 소통과 화합의 장소였다. 또한, 월대를 둘러싼 광화문 권역 역시 국왕의 궁궐 밖 행차에서 어가 앞 상소 등을 통해 백성과 소통을 이루어지던 공간이었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월대 위로 난 도로로 인해 지금까지 복원이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문화재청은 서울시와 협조하여 월대 복원 등을 통해 광화문 역사광장을 조성하여 역사성과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고, 역사문화교육 자원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앞으로 문화재청은 옛 사진과 도면 등의 문헌을 조사․분석하고, 철저한 고증과 복원 설계 등을 거쳐 경복궁 월대를 복원 정비하고, 또한 현재 광화문 앞을 지키고 선 해태상의 원위치를 찾아 제자리로 돌려놓을 계획이다.



  경복궁은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117호)로 조선 태조 4년(1395년) 9월 준공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고종 5년(1868년) 중창되면서 500여 동의 건축물과 후원 등으로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공원화하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훼철되었다. 이후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피해가 더해지면서 경복궁 1차 복원사업이 시작되던 1990년 시점에서는 불과 36동만이 남은 상태였다.



  이에 문화재청은 장구한 문화국가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 온전한 경복궁 복원을 위해 1990년부터 2010년까지 경복궁 1차 복원사업을 시행하여 89동을 복원하였으며, 2011년부터 2045년까지 80동을 추가로 복원하고, 유구를 정비하기 위한 경복궁 2차 복원사업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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