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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8. 7. 14:40

대관령 재궁골 국사 성황당과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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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재궁골 국사 성황당과 산신각

 

-대관령 성황이 된 범일국사와 산신 김유신 장군

 

 

해마다 음력 55일에 강릉 시내는 떠들썩하다. 양수인 5가 둘이나 겹쳐 일 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다. 농경문화 중심의 우리민족은 이날 파종제를 하늘에 올리고, 본격적인 모내기에 들어간다. 단오는 수릿날, 천중절, 중오절, 단양절 등으로 불렸다. 민간에서는 단오세시풍습으로 물맞이, 창포물에 머리 감기, 씨름, 그네뛰기 등 다양한 민속 몰이들이 펼쳐진다.

특히 강릉지역 단오제는 대관령 성황과 산신에게 제의를 올리고, 강릉으로 모셔오는 신주빗기로부터 시작된다.

 

 

범일국사와 김유신 장군 그리고 허균

 

대관령 산신은 신라의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김유신 장군이다. 이를 처음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학문의 기본으로 두고 있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 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있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를 생각하기도 했을 정도로 불교의 진리에 깊이 심취했다. 또한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 없다고 당당히 밝혔다.

허균은 1603년에 명주에 머물며 단오제를 보고 기록을 남겼다. 김유신은 명주에서 공부하면서 대관령 산신에게 무예를 배웠고, 선지사에서 칼을 만들어 삼국을 통일했다. 그는 죽어서 강릉의 수호신,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대관령 산신에게 무술을 배웠다는 것은 삼국시대 이전에도 산악신앙의 숭배가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삼국유사에는 석탈해가 죽어 토함산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도 전해 신라인의 산신신앙의 단면을 알 수 있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국사성황신은 산신과 마찬가지로 언제 어떻게 자리를 잡은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강릉 지역에서는 신라 고승 범일이 국사성황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범일 스님을 대관령 성황으로 밝힌 기록은 1931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 강릉군대관령 새신부분에 "대관령에는 한 개의 성황이 있는데, 즉 범일국사로서 강릉에서 출생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국사성황인 범일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까지 활동한 고승이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 출생으로 탄생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처녀가 해가 떠 있는 샘물을 마시고 태기가 있었고 아이를 낳았다.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이 두려워 뒷산 학바위에 버렸으나, 학이 보살펴 기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 키웠다. 국사는 비범한 외모와 뛰어난 학문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출가하여 신라 말에 국사가 되어 이름을 떨쳤다. 또한 죽어서 대관령 서낭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범일의 신이한 탄생과 모험 그리고 위인이 되고, 죽어서 신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영웅담처럼 차례로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범일을 뜰 범(), 해일()자로 쓰기도 하는데, 이는 신화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원명은 범일(梵日)이며, 국사성황이 바로 신라 고승 범일국사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범일국사의 다른 모습

 

대관령 재궁골로 가는 길은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은 아니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진부와 횡계를 거쳐 강릉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중간 기착지인 횡계에서 내려야 한다. 지금은 복선화되어 새로 개통된 고속도로 덕에 2시간 정도면 도착이 가능하다. 횡계 지역은 시내버스가 드물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대절하여 재궁골로 이동했다. 대관령 휴게소로가는 구 도로를 이용하여 약 6KM 정도 가다, 대관령 목장을 지나 좌측으로 접어들면 재궁골이 자리한다. 대관령 능경봉에서 선자령으로 이어지는 능선 아래 계곡이다. 재궁골은 이 계곡의 동쪽 숲속의 빈터에 위치한 아늑한 곳에 국사성황 범일국사를 모신 성황사, 산신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당이 있고, 기도처인 칠성당과 샘물 용정이 모여 있어 '신터'라 불리운다.

주차장을 지나 관리동 좌측으로 성황사가 보이고, 그 뒤로 산신각, 용정, 칠성목() 이 자리한다. 때마침 단오를 맞아 성황사에서는 신주굿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자인 박수 무당이 조상신들에게 치성을 들이는 여인네를 성황신의 조력으로 재복을 비는 무속 신앙을 펼치고 있었다.

굿 판 너머로 보이는 성황신의 탱화는 기자가 상상했던 범일국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양옆으로 호랑이의 호위를 받으며 부관이 고삐를 쥔 백마를 탄 무관의 모습이다. 한손에는 활까지 쥐고 있다. 분명히 불교의 고승대덕의 모습은 아니다. 이는 무속 신앙인들이 바라는 모습으로 그형상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대관령의 성황은 인자한 고승의 모습보다는 나그네와 마을을 지켜주는 무장의 모습이기를 염원한 탓이라 추정된다.

성황당 뒤편으로 자리한 산신각에서도 나의 예상은 그대로 빗나갔다. 김유신 장군의 모습을 상상하고 전각 앞에 다다르니, 여느 산신각과 같이 긴 수염에 상투를 틀고 한손에는 부채를 쥐었다. 동자의 선도 복숭아 공양을 받으며 옆으로 호랑이를 옆에 두었다. 이 탱화 역시 산신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변한 김유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부채다.

 

유교와 무교의 절묘한 만남

 

 

 

강릉단오제의 가장 재미있는 상황은 재궁골 성황당 앞에서 벌어진다. 불교나 무속을 사이비로 치부했던 유교식 제사가 단오를 앞두고 이곳 성황신인 범일국사에게 올려 진다. 유교식제사에 이어 무교식 굿 판이 벌어지는데, 상극의 이념을 가진 두 제의가 서로 충돌할 것 같지만 재궁골에서는 이를 모두 포용하는 자리를 펼친다.

단오제의 제례는 신주빚기부터 산신제, 성황제, 봉안제, 영신제, 네번의 조전제와 마지막으로 송신제 까지 9번의 제례를 지낸다. 제례를 지내는 형식은 모두 같은 절차에 의해 진행되고 신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제의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진다.

강릉 단오제는 산행길의 안전이나, 바다를 접한 동해안 주민들의 풍어, 집안의 태평등을 기원하는 제의와 민속놀이의 전통 문화 요소들이 잘 보전되어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재궁골 역시 강원도 평창군에 속하지만 강릉시가 지역을 임대하여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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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5. 10. 16:08

관악산 연주암 금륜보전과 호압사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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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산 연주암 금륜보전과 호압사 삼성각

 

-서울의 조산(朝山)으로 주산(主山)인 북한산과 도봉산을 감시 감독하는 관악산

 

 *연주암 금륜보전

 *금륜보전 내부

 *금륜보전 산신

*호압사 산신

 

관악산과 광화문 해태상

 

관악산은 한강 이남에 우뚝 솟은 명산이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과천시와 경계를 이룬다. 높이 623m 로 서울 북쪽의 북한산, 한강 동쪽의 남한산과 더불어 서울을 둘러싼 자연 방벽이다.

관악산(冠岳山)은 그 모양새는 그 꼭대기가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갓 모양의 산이란 뜻으로 관악(冠岳)이라 불렀다,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아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를 금강산에 견주어 소금강(小金剛) 혹은 서쪽의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이 개국하고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건설한다. 하지만 풍수상 화산(화산)에 해당하는 관악산이 남쪽에 버티고 섰다. 불의 기운이 궁궐을 침입한다다는 풍수상의 가정아래 물의 동물이며, 불을 먹고 사는 해태를 광화문입구에 세움으로 비보책을 세웠다. 당시 궁궐에서 가장 큰 재앙은 화재였다.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 덕수궁 등 조선의 궁궐들에는 화재를 막기 위한 비보책으로 곳곳에 해태와 청동 물 항아리를 만들어둔다.

 

관악산의 연주대 와 연주암의 숨은 이야기

 

관악산의 주봉인 연주대는 해발 629m에 위치해 있다.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말사인 연주암이 있다. <연주암중건기>등의 자료에 의하면 서기 677년 신라 의상대사가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정진하고, 그 아래 관악사를 세웠다 한다. 하지만 당시 유물과 문헌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연주암에는 관악사가 연주암으로, 의상대가 연주대로 이름이 바뀐 연유가 두 가지 전해내려 온다. 그 하나는 고려가 망하자 충신이었던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관악산으로 은신한다. 이들은 의상대에 올라 멀리 송도(松都, 개경)을 바라보며 고려 왕조를 그리워했다. 이를 연유로 사모할 연(), 주인, 임금 주()를 써 연주대(戀主臺)라 불렸다는 설화가 있다. 둘째로, 조선 태종의 두 아들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에에 얽힌 설화이다. 태종은 왕위를 셋째인 충녕대군( 후의 세종)에게 물려주려하자, 두 대군은 정처 없는 유랑 길을 떠난다. 둘은 관악사를 찾아 왕위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려 했으나 마음은 더 혼란스러웠다. 이 둘은 관악사의 위치가 궁궐을 보기에는 어려워 40칸의 당우를 새로 건립하고, 지금의 자리로 사찰을 옮긴다. 후에 사람들은 이 두 대군의 뜻을 기려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바꿔 불렀다 한다.

일부 무속인 들은 관악산의 산주(山主)가 강감찬 장군이라 한다. 1990년 이전에는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였다. 관악산 자락의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로 지금은 장군의 동상이 들어서있다. 또한 최근 관악구는강 감찬 장군을 기리는 거리축제를 여는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관악산 산신이 자리한 연주암 금륜보전(金輪寶殿,삼성각)

 

관악산 연주암에 있는 삼성각은 다른 사찰과 달리 금륜보전(金輪寶殿)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네 칸짜리 전각이다. 전각의 내부가 달리 특이한 것이 있나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타 사찰의 삼성각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사찰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금륜보전이라는 이름은 칠성탱화를 칠성여래 부처님을 모셨기에 삼성각 보다는 한 단계 위인 부처님의 거처로 금륜보전 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찰에도 칠성을 여래의 형상으로 표현한다.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금륜(金輪)이란 허공륜, 풍륜, 수륜(水輪)과 함께 사륜(四輪)을 이룬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지의 구성을 표현한 것으로, 구사론(具倽論) 세간품(世間品)에 설해진다. 그렇다면 칠성과 독성 나한을 금륜을 관장하는 왕으로 보고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에 중점을 두어, 금륜왕이 머무는 보전(寶殿)이라 칭한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금륜보전 안에는 칠성, 독성과 함께 산신이 모셔져있다. 산신탱 화기에는 1929년 주지 재예스님 등이 시주하여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산신의 모습은 상투를 튼 백발의 노인으로 여느 산신과 다르지 않다. 다른 특징은 오른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왼손으로 백익선을 잡고, 바위에 걸터앉지 않고 주질한 사각 등방지의 의자에 앉아있다. 산신의 오른편에는 두명의동자가 시중을 들고, 왼쪽의 호랑이는 조선 후기 민화의 호랑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제작 연대가 1929년으로 일제 강점기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우리나라 호랑이의 강한 기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해학적인 민화적 수법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금륜보전은 1979년에 연주대와 함께 다시 중수 되었다.

 

관악산의 지맥 삼성산 호압사(虎壓寺)산신

 

호압사(虎壓寺)는 글자 그대로 호랑이를 누르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관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삼성산 자락에 자리한 호압사는 조선 태조2(1391)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이 사찰 역시 조선의 궁궐에 대한 풍수와 관련이 있다. 관악산이 불의 기운이고, 삼성산(당시에는 호암산)은 호랑이의 기운을 가졌다 전한다. 태조와 무학대사는 이를 제압하기위해 광화문에 해태와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으로 이 짓고, () 자의 뫼 산()자를 불꽃으로 표현하였다. 또 삼성산의 호랑이 기운을 차단하기위해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사찰을 지어 호압사라 이름 한다.

호압사는 약사전을 주전으로 하고 그 정면의 왼편으로 삼성각이 자리한다. 보통의 경우에는 주전각의 뒤편으로 자리하지만 비보사찰임을 감안한다면 경내로 들어앉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삼성각에 모셔진 산신탱화 역시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고 있다.

산신탱은 여느 산신탱과는 조금 다른 구성을 가졌다. 두 마리의 호랑이를 그려놓고 산신이 이중 한 마리를 깔고 앉았다. 이는 호압사의 비보기능을 나타내는 주요 상징이다. 산신의 주위로 세 명의 동자가 시중을 들고, 뒤로는 소나무와 선계의 과일인 복숭아가 열린 가지가 그려져 특이하다.

관악산=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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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45

산신각: 휴전선 남쪽 제일의 명산 설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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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 남쪽, 제일의 명산

 

 

 

 

설악산 누구나 한번은 가 보았던 남한 제일의 명산이다. 웅장한 바위들이 탐방객 압도하고, 안으로는 굽이굽이 계곡이 숨은 천해의 비경을 간직한 곳이다.

높이 1,707.86m.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백두대간의 허리부분으로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雪岳이란 이름의 유래는 동국여지승람에는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하지에 이르러야 녹는다 하여 설악이라 불린다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밖에 설산(雪山설봉산(雪峯山)이라고도 불렀다.

설악산은 태백산맥 연봉(連峯) 중의 하나로 최고봉인 대청봉(大靑峯)과 그 북쪽의 마등령(馬等嶺미시령(彌矢嶺), 서쪽의 한계령(寒溪嶺)에 이르는 능선을 설악산맥이라 하며 그 동부를 외설악, 서부를 내설악이라 한다. 또한 동북쪽의 화채봉(華彩峯)을 거쳐 대청봉에 이르는 화채릉, 서쪽으로는 귀떼기청봉에서 대승령(大勝嶺안산(安山)에 이르는 서북릉이 있고, 그 남쪽 오색약수(五色藥水)·장수대(將帥臺)일대를 남설악이라 부른다.

외설악의 북부에는 쌍천(雙川), 남부에는 양양 남대천(南大川)이 흘러 동해로 들어가고, 내설악의 북부에는 북천(北川), 남부에는 한계천(寒溪川)이 서쪽으로 흘러 북한강의 상류를 이룬다.

지질은 화강편마암·결정편암·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차별침식 및 하식작용으로 지금과 같은 기암괴석의 아름다운 경관이 만들어졌다.

금강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밀려 역사적으로 주목 받지는 못했지만,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봉정암과 오세암, 백담사, 신흥사, 낙산사 등 많은 불교 유적과 암자들이 있다.

 

설악의 중심사찰 신흥사와 삼성각

 

설악산에 있는 대표적인 사찰로는 내설악의 백담사와 외설악의 신흥사를 들 수 있다.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한계리(寒溪里)에 지은 이후 잦은 화재로 설악산 안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

설악산 국립공원 입구는 외설악의 권금성을 앞에두고 뒤로는 울산바위가 호위하는 신흥사가있다. 이 사찰은 조선 인조 때 고승 운서(雲瑞연옥(連玉혜원(惠元) 등이 진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한 향성사(香城寺)의 자리에 창건한 절이다. 지금은 조계종 제3교구 교구본사이다.

신흥사 삼성각은 극락보전 뒤편으로 자리한다. 정면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칠성단을 중심으로 좌. 우로 독성과 산신을 모셨다. 설악산과 신흥사의 역사성을 보고 조선말엽이나, 일본 강점기에 조성 되었을 것으로 잔뜩 기대를 품고 들어선 삼성각 안에는 너무도 밝은 색상의 산신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었다.

화기(畵記)를 보니 불기 2531, 서기 1987년에 조성된 탱화였다. 유난히 금박이 도드라져 보이는 산신탱은 소나무와 폭포,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좌측에는 호랑이와 우측으로 세 명의 동자가 시봉을 드는 모습이다. 다른 사찰의 산신탱과 비교되는 부분은 태극을 청, 홍으로 분리하여 엎어놓은 모양의 눈과 상투의 장식부분이 금박으로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동자가 든 지팡이에 매달린 호리병도 금박으로 장식한 뜻은 무엇인지? 시주를 위한 방편인지 아니면 다른 깊은 뜻이 있는지는 기자의 짧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현대 산신탱에 대한 연구는 아직은 미흡한 편이라 앞으로 학자들의 연구가 기대된다.

 

설악산 사찰에 전해오는 설화

 

백담사 산신 설화

 

백담사(百潭寺) 창건 이래 지금의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1783년까지 무려 일곱 차례에 걸친 화재를 입어 그때마다 사찰을 옮기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면 어느날 주지스님의 꿈에 나타난 백발노인이 일러준 대로 대청봉에서 절까지 물웅덩이()를 세어 백 번째가 되는 현재의 자리에 절을 세우고 백담사(百潭寺)’라 이름 지은 후부터 좀처럼 화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관세음보살 영험설화를 간직한 오세암

 

산신의 계시로 사찰을 중창한 출가한 백담사, 뒤편으로 마등령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조선조 최고의 명문장을 자랑한 금오신화의 저자 매월당 김시습과 만해선사가 머물며 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참배객과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암자다.

원래 오세암은 관음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한 것은 1643(인조 21)에 설정(雪淨)이 중건한 다음부터이며, 유명한 관음세음보살 영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정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동 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조카를 위해서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는데 밤새 폭설이 내려 키가 넘도록 눈이 쌓였으므로 혼자 속을 태우다가 이듬해 3월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려 달려가 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 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觀音庵)을 오세암(五歲庵)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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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21

호국불교와 산신신앙의 원당 도선사와 삼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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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불교와 산신신앙의 원당 도선사와 삼천사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우리 가까이 있는 가장 웅장하고 그 산세가 깊다. 예로부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 오악(五嶽)에 포함되는 명산이다. 세 봉우리인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가 큰 삼각형으로 놓여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삼각산(三角山) 또는 삼봉산(三峰山), 화산(華山), 부아악(負兒岳) 등으로도 불린다. 고려시대부터 삼각산이라고 하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북한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울의 진산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중생대 말기에 지층에 파고든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표면에 드러났다가 다시 풍화작용을 받아 험준한 바위산이 되었다.

 

무학대사가 서울을 내려다 본자리?

 

주봉인 백운대에 오르면 서울 시내와 근교가 한눈에 들어오고, 맑은 날에는 강화도·영종도 등 황해의 섬도 보인다. 인수봉은 암벽 등반 코스로 인기가 높다. 봉우리 북쪽에 튀어나온 바위가 마치 아이를 업은 모양 같다고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자리잡고 살 만한 땅을 고를 때 이 봉우리에 올라 서울의 지세를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백운대의 남쪽에 있는 만경대는 주변 경관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예로부터 국망봉이라 불렸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지를 정할 때 여기에 올라서 내려다보고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외에도 노적봉(716m)·영봉(604m)·비봉(碑峰:560m)·문수봉(716m)·보현봉(700m) 등 이름난 봉우리만도 40여 개나 된다.

조선시대 때 수도의 방어를 담당했던 북한산성,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 터를 비롯해 유명한 북한 이궁지(離宮址), 진관사·문수암·태고사·원효암·상운사(祥雲寺도선사(道詵寺승가사·화계사 등 많은 사찰과 문화유적이 산재한다. 서울 외곽에 있어 연중 등산객과 일반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83년 도봉산과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오악사상

···북 및 중앙지역을 대표하는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북한산)을 일컫는다. 오악의 개념은 중국의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비롯되었으며, 오악에는 나라의 수호신(守護神)이 거처한다고 믿어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여겨 왔다. 신라 때에는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과 부악(父岳:지금의 팔공산)을 오악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고, 고려 때에는 덕적산(德積山) ·백악(白岳) ·목멱산(木蠶山:지금의 남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특히 백두산은 일찍부터 한민족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종주산(宗主山)으로서 조선 영조 때 망덕산(望德山)에 백두산단을 만들어 망제(望祭)을 지낸 일이 있다.

 

 

 

 

국가기도도량 도선사(道詵寺)

 

 

신라 경문왕 2862년 도선(道詵)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도선은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防番보초 임무)을 서기도 하였다. 1863(철종 14) 김좌근(金左根)의 시주로 중수하고 칠성각(七星閣)을 신축하였으며, 1887(고종 24)에는 임준(任準)이 오층탑을 건립하고, 그 속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였다.

1903년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904년 국가기원도량(國家祈願道場)으로 지정받았다. 1916년 도선사의 중흥주인 청담(靑潭)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당시 박정희 대통령 및 육영수 여사 등의 시주로 도량을 중수하였다. 이어서 호국참회원을 건립하고 불교의 평화 염원에 입각한 실천불교와 생활불교운동을 전개하였다.

호국참회원은 19771115일에 완공한 종합 포교센터이다. 지하 1, 지상 3, 총 면적 1,000평의 콘크리트 한옥식 건물로, 법당·영사실·도서실·신앙상담실·수련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문화재로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석불이 있다.

 

 

 

'산신이 보좌를 튼 절' 삼천사

도선사와는 산의 반대편에 위치한 진관외동의 삼천사는신라 문무왕 원년인 661년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 1481(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한때는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 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1592(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진영이 중창하였다.

1950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0년에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특히 산령각은 정면 2, 측면 2칸의 전통 건축양식인 맞배지붕으로 을해년에 개축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산신과 호랑이를 그린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는데 산신은 산의 영()으로 산을 지키며 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하는 신으로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산의 주인으로서 늘 가람의 뒤쪽에 자리하며 불법을 수호(守護)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좌우에 각각 독성탱화와 칠성탱화를 봉안하고 있는데 다른 사찰과는 달리 나무에 새긴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삼각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런 이유에서 삼천사를 '산신이 보좌를 튼 절'로 부르기도 한다. 영험한 곳으로 소문이 나 많은 기도객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있다.

편집 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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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6:00

안동 봉정사 삼성각과 제비원 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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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화엄 밀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봉정사 삼성각

 

 

 

 

 

 

안동. 불법의 향기를 품은 국화 같은 고장

 

안동하면 소수서원, 양반 마을, 하회탈, 간 고등어 등 여러 단어들이 떠오른다. 몇 해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왔을 때 ,하회마을 류성룡의 종가와 봉정사를 방문했다. 하회마을은(중요민속자료 제122)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유학이 성행하고, 양반가의 명망으로 이름이 높은 안동에는 의의로 많은 불교문화재가 남아있다. 고려시대 전탑의 웅장한 모습을 전해주는 신세동 전탑을 비롯해 살아있는 불교건축 박물관인 봉정사, 거대한 통 바위 위에 불두 만 조성해 얻은 제비원 미륵불 등 발길 닫는 곳 마다 불교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봉정사는 소백산 자락의 천등산에 자리한 전통 사찰로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천등산 자락은 국화 재배로 유명하다. 사찰이 위치한 서후면은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에 국화 축제를 열고, 전국의 불자와 관광객들에게 국화의 진한 향기를 선사한다.

 

천상의 선녀도 감복한 불퇴전의 수행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창건하신 사찰이다. 스님이 한창 수행 정진 할 때, 산세 좋기로 유명한 대망산(지금의 천등산) 기슭의 바위굴에서 공부했다. 스님의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천상의 선녀가 바위굴을 찾아 하늘에서 가져온 등불로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때부터 스님이 공부하던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하고, 대망산이라 불리던 산의 이름도 천등산'이라 부른다. 능인스님은 이후 더욱 수행에 매진하여 얻은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떨어져 산문을 개산한다. 스님이 말린 종이 봉황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봉정사라는 이름을 짖는다.

봉정사는 창건 설화만큼 오래 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다름 아닌 봉정사 극락전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고,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본존은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한다.

 

천등산을 감싼 진언의 기운

 

대망산이었던 천등산은 봉정사 극락보전 왼편으로 삼성각을 두고 있다. 여느 삼성각과 마찬가지지만, 외전으로 자리하는 터라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단칸집이다. 그러나 출입구 양쪽에 벽을 설치하여 언 듯 보기에는 단칸이지만 세 칸으로 보이는 양식이다. 산신, 칠성, 독성을 나란히 봉안한 전각은 천등을 이어나가는 외호신으로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산신도와 산신상을 함께 모셨는데, 지나치게 커 보이는 소나무는 다른 지역의 산신도의 양식과 조금 다른 특별함을 보인다. 산신각을 천천히 살피던 중 지붕아래 보에서 범자 옴자와 마자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사찰의 산신각, 삼성각을 취재했지만 범자가 보나, 도리에 새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천등사 대웅전의 우물 천정에서도 관세음보살 육자진언을 만났다. 정확한 사료의 분석과 검토를 해야 밝혀지겠지만,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의 화엄종의 수 사찰인 부석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진 화엄 밀교에 그 연원을 추정해 본다. 또한 11세기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13세기 경에 널리 퍼진 밀교 경전 대승장엄보왕경의 육자진언과 성음구제사상의 영향으로 밀교적 화엄사상이 고려 말기에 이 지역에도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과 성주풀이

 

서후면 봉정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비원 미륵 석불은 보물 제116호로 자연암벽에 불신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는 따로 제작하여 올려놓은 거구의 불상이다. 미소를 띤 풍만한 얼굴은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붉게 채색된 두터운 입술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이다. 삼도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새겨 장식하였다.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 주름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불상의 발아래 단판연화문으로 음각으로 새겼다.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 조각 양식으로 보아 11세기 무렵, 고려 마애불의 유행고 함께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음각으로 새겨진 수인에는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이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 마애불의 이름은 제비원 미륵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 불교문화의 단면을 결정적인 단서이다. 자연거석을 하나의 석상 보고자 하는 고려 마애불의 특징적 형태이다. 또한 불상의 일부를 입체적으로 표현된 양식은 통일 신라의 조각 기법과 고려의 표현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사이의 정치적 변동과 맞물려 미륵신앙이 점차 고개를 들었다. 특히 하층민들의 경우 종교성이 강한 미륵신앙에 새로운 희망을 걸게 된다. 제비원 미륵불은 고려 건국의 복잡한 정세를 타고 변모하는 민중불교의 성격을 가지는 미륵신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석불상이라 볼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은 오랜 민속신앙인 성주신앙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가옥을 짓거나 이사를 하면 성주신에게 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성주신은 가택신을 말하는데 선조들은 성주신이 가옥을 지키고, 가옥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바로 그 민속 신앙의 그 발원처가 안동의 제비원 미륵 부처님이다. 성주고사 때 부른 성주풀이에는 성주의 근본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에 솔씨 받아...”라는 가사에 나오듯 이곳 제비원 미륵이 바로 우리나라 모든 가택을 지켜주는 성주신임을 확인해 준다. 제비원의 미륵 부처님은 성주신으로 화현하여 오랜 동안 우리의 집안을 지켜온 것이다. 안동=김종열 기자.

 

 

-11세기 화엄 밀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봉정사 삼성각

 

안동. 불법의 향기를 품은 국화 같은 고장

 

안동하면 소수서원, 양반 마을, 하회탈, 간 고등어 등 여러 단어들이 떠오른다. 몇 해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왔을 때 ,하회마을 류성룡의 종가와 봉정사를 방문했다. 하회마을은(중요민속자료 제122)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유학이 성행하고, 양반가의 명망으로 이름이 높은 안동에는 의의로 많은 불교문화재가 남아있다. 고려시대 전탑의 웅장한 모습을 전해주는 신세동 전탑을 비롯해 살아있는 불교건축 박물관인 봉정사, 거대한 통 바위 위에 불두 만 조성해 얻은 제비원 미륵불 등 발길 닫는 곳 마다 불교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봉정사는 소백산 자락의 천등산에 자리한 전통 사찰로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천등산 자락은 국화 재배로 유명하다. 사찰이 위치한 서후면은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에 국화 축제를 열고, 전국의 불자와 관광객들에게 국화의 진한 향기를 선사한다.

 

천상의 선녀도 감복한 불퇴전의 수행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창건하신 사찰이다. 스님이 한창 수행 정진 할 때, 산세 좋기로 유명한 대망산(지금의 천등산) 기슭의 바위굴에서 공부했다. 스님의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천상의 선녀가 바위굴을 찾아 하늘에서 가져온 등불로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때부터 스님이 공부하던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하고, 대망산이라 불리던 산의 이름도 천등산'이라 부른다. 능인스님은 이후 더욱 수행에 매진하여 얻은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떨어져 산문을 개산한다. 스님이 말린 종이 봉황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봉정사라는 이름을 짖는다.

봉정사는 창건 설화만큼 오래 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다름 아닌 봉정사 극락전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고,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본존은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한다.

 

천등산을 감싼 진언의 기운

 

대망산이었던 천등산은 봉정사 극락보전 왼편으로 삼성각을 두고 있다. 여느 삼성각과 마찬가지지만, 외전으로 자리하는 터라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단칸집이다. 그러나 출입구 양쪽에 벽을 설치하여 언 듯 보기에는 단칸이지만 세 칸으로 보이는 양식이다. 산신, 칠성, 독성을 나란히 봉안한 전각은 천등을 이어나가는 외호신으로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산신도와 산신상을 함께 모셨는데, 지나치게 커 보이는 소나무는 다른 지역의 산신도의 양식과 조금 다른 특별함을 보인다. 산신각을 천천히 살피던 중 지붕아래 보에서 범자 옴자와 마자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사찰의 산신각, 삼성각을 취재했지만 범자가 보나, 도리에 새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천등사 대웅전의 우물 천정에서도 관세음보살 육자진언을 만났다. 정확한 사료의 분석과 검토를 해야 밝혀지겠지만,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의 화엄종의 수 사찰인 부석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진 화엄 밀교에 그 연원을 추정해 본다. 또한 11세기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13세기 경에 널리 퍼진 밀교 경전 대승장엄보왕경의 육자진언과 성음구제사상의 영향으로 밀교적 화엄사상이 고려 말기에 이 지역에도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과 성주풀이

 

서후면 봉정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비원 미륵 석불은 보물 제116호로 자연암벽에 불신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는 따로 제작하여 올려놓은 거구의 불상이다. 미소를 띤 풍만한 얼굴은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붉게 채색된 두터운 입술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이다. 삼도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새겨 장식하였다.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 주름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불상의 발아래 단판연화문으로 음각으로 새겼다.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 조각 양식으로 보아 11세기 무렵, 고려 마애불의 유행고 함께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음각으로 새겨진 수인에는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이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 마애불의 이름은 제비원 미륵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 불교문화의 단면을 결정적인 단서이다. 자연거석을 하나의 석상 보고자 하는 고려 마애불의 특징적 형태이다. 또한 불상의 일부를 입체적으로 표현된 양식은 통일 신라의 조각 기법과 고려의 표현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사이의 정치적 변동과 맞물려 미륵신앙이 점차 고개를 들었다. 특히 하층민들의 경우 종교성이 강한 미륵신앙에 새로운 희망을 걸게 된다. 제비원 미륵불은 고려 건국의 복잡한 정세를 타고 변모하는 민중불교의 성격을 가지는 미륵신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석불상이라 볼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은 오랜 민속신앙인 성주신앙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가옥을 짓거나 이사를 하면 성주신에게 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성주신은 가택신을 말하는데 선조들은 성주신이 가옥을 지키고, 가옥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바로 그 민속 신앙의 그 발원처가 안동의 제비원 미륵 부처님이다. 성주고사 때 부른 성주풀이에는 성주의 근본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에 솔씨 받아...”라는 가사에 나오듯 이곳 제비원 미륵이 바로 우리나라 모든 가택을 지켜주는 성주신임을 확인해 준다. 제비원의 미륵 부처님은 성주신으로 화현하여 오랜 동안 우리의 집안을 지켜온 것이다. 안동=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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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2. 3. 6. 14:13

산신각 기행- 범어사와 고당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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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와 고당 할매

-사원 수호의 의지를 담아 금정산을 지키는 고당 할매

-금정산 고당봉 고모령신당

-범어사 산령각

-범어사 산령각 산신

-범어사 팔상전,독성각,나한전

-범어사 비로전과 미륵전 사이


부산의 주산 금정산

부산이 고향인 기자는 어려서부터 금정산과 떨어질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본 제일 큰절도 금정산 자락의 범어사였고, 얼마 전 합가를 하신 어머니의 거쳐도 바로 금정산 아래 남산동이었다. 지금은 작은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한때는 동물원과 케이불카를 갖춘 공원이었던 금강공원 역시 금정산 아래에 있다. 부산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과,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금정산과 연관을 맺고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

태백산맥이 남으로 뻗어 내달리다 한반도 동남단 바닷가에 이르러 우뚝 솟은 봉우리를 형성한다. 해발 801미터부산의 주산 금정산이다. 최고봉은 고당봉이고 북쪽으로 장군봉, 계명봉 남으로 원효봉, 의상봉, 파리봉, 상계봉들이 백양산으로 이어진다.

금정산과 범어사는 그 이름의 유래부터 같이 한다.<삼국유사>에는 금정범어(金井梵魚)로 표기되어 있어 신라시대 이전부터 연관 지어 불린 것으로 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산 이름의 유래에 대해 ‘동래현 북쪽 20리에 금정산이 있고, 산 정상에 세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척이요 깊이가 7척 정도다. 물은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전설로는 한 마리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금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로 인하여 절을 짓고 범어사라 부른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지금도 고당봉에서 내려다 본 금정에는 여전히 마르지 않는 푸른 샘물이 그득하다.

범어사와 고당 할매

금정산 고당봉 아래에 자리한 범어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 3대 사찰 중의 하나다. 서기678년 신라 문무왕대 의상대사가 해동 화엄십찰중의 하나로 창건하였다. 일찍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승들의 수행처로 의상대사, 원효대사, 표훈대덕 으로부터 근세의 경허,용성, 한용운, 동산스님에 이르는 선맥(禪脈)의 총본산이다. 1950년대에는 범어사 조실로 주석하던 동산스님의 주도로 불교정화운동을 편 역사적인 사찰이다. 보물 제 434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한 수많은 성보문화재가 있다.

범어사에는 고당봉과 고당 할매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먼저 금정구청이 지명확정을 위한 위원회를 개최했을 때 고당봉은 고당(高幢)과 고당(姑堂) 두 가지의 한자어가 병존하고 있었다. 위원회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산신의 대부분은 여신이었다. 따라서 금정산 고당봉에도 할미신의 전설이 내려오므로 할미 고(姑)자와 집 당(堂)자를 써 고당봉이라 확정하고 표석을 건립했다. 그럼 할미 신에 대한 전설은 무엇일까? 이 또한 두 가지로 전해오는데 하나는 하늘의 신선 할미가 고당봉에 내려와 자리를 잡고 금정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범어사와 관련된 설화로 밀양 사람 박씨 보살에 관한 이야기다. 박 보살은 일찍이 결혼하였으나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해 범어사 화주 보살의 역할을 하였다. 박 보살은 절의 대소사만이 아니라 살림까지 도맡아 할 정도로 불법을 외호하는 삶을 살았다. 박 보살이 죽을 때가 되어 범어사 큰스님에게 유언을 남긴다. “스님. 제가 죽으면 화장하여 금정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뿌려 주십시오, 그 봉우리에 작은 집을 짓고 정월 보름과 단오날에 제를 지내 주시면 높은 곳에서 범어사를 영원히 지키겠습니다.”며 마지막 순간 까지도 범어사를 걱정하는 불심을 보였다. 큰스님은 유언대로 제일 높은 봉우리에 산신각을 짓고 이름을 할미 고(姑)자와 집 당(堂)자를 써 고당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산신각이 위치한 봉우리를 고당봉이라 불렀다는 설화다. 그러나 한때 젊은 스님이 당제를 지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집을 훼손했는데, 그 뒤로 재앙이 끊이지 않아 다시 고모당을 고쳐지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지금은 고당봉 큰 바위 아래에 콘크리트로 지어진 1평 남짓한 작은 당집으로 존재한다. 당집 안에는 고모할미의 산신도가 걸려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산왕대신의 위패와 고모령신 위패가 나란히 놓여있다. 지금도 민간 무속 신앙인과 이곳을 오르는 등산객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다.

범어사의 특이한 공간 활용 법

범어사의 가람배치는 산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배치한 선조들의 지혜가 스며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지장전과 팔상, 독성, 나한전이 배치되었고, 지장전 뒤편 큰 바위위에 산령각을 지었다. 서편으로는 관음전을 두었고, 석축 아래 남북으로 비로전과 미륵전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산령각에는 고모할미가 있지 않고, 일반적인 산신의 모습을 한 산신탱이 봉안되어있다. 고당 할미의 전설을 사찰내로는 들이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범어사 사찰 건축 중 한번 눈여겨 볼 특이한 건물이 있다. 한 채의 건물에 나란히 배치된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이다. 원래는 팔상전과 나한전이 독립된 건물이었다. 그 중간에는 천태문이라는 출입문이 있었다. 1905년에 중수를 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데, 가운데 독성전은 1칸을 사용하는 구조로 문틀을 반원형으로 만든 독특한 모습이다. 원래 두 채의 건물 사이의 공간으로 보여지는데, 중수 하는 과정에서 두 건물을 이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듯하다. 두 개의 건물을 하나로 이어 새로운 건물로 탄생시킨 대목장의 기지에 감탄 할 뿐이다. 또 하나는 비로전과 미륵전 두 전각의 사이다. 원래는 처마사이로 떨어져 있어야 할 공간에 문이 두짝 달려있다. 새로운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범어사를 거쳐 간 대목장들은 사원의 작은 빈틈도 조화롭게 꾸미는 혜안을 가졌던 것 같다. 지금은 보제루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대웅전 앞 마당이 어수선하지만 복원이 완료 되면 예전의 오밀 조밀 하지만 당당한 가람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전국 제일의 불교 도시 부산.

불교계 기자라면 누구나 부산 불자들의 놀라운 신심에 감탄을 자아낸다. 기자가 H불교신문 부산지사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2005년, 범어사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H불교신문과 범어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설선대법회 입제식 날이었다. 초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3월 5일 부산에는 100여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지역의 특성상 많은 눈이 내리면 도시의 교통은 거의 마비 상태가 된다. 하지만 폭설 속에서도 3,000여명의 불자들이 선사의 사자후를 듣기위해 범어사로 모여 들었다. 눈이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자리를 지키는 부산지역 불자들의 용맹정진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이후 법회는 매주 토요일 총 10회에 걸쳐 진행 되었는데, 입제식의 불자들이 회향식까지 빠짐없이 참석하는 아름다운 현장이 지금도 생생하다. 요즘은 불교는 대형화의 길을 가고 있다. 어느 사찰의 신도가 얼마라더라, 방생법회에 버스가 몇 대 동원되었다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가슴 한쪽이 먹먹해 진다. 잘 못 방향을 정하면 이웃종교가 범했던 우를 우리도 격을까 걱정되는 마음은 떨칠 수 가 없다. 범어사=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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