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땅,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낸 고려인불교인사이드
김기자가 가다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9. 4. 19. 14:18

슬픔의 땅,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낸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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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종단협의회(회장 원행스님, 이하 종단협)는 사무총장 지민스님을 단장으로 각 종단 스님들과 재가 종무원들로 대표단을 구성, 4월 5일 부터 4월 11일까지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해 '고려인 위령제'와 '고려인 한국문화체험문화제'를 열었다.

우즈베케스탄 타슈켄트 빅티미르 고려인 묘지

한국불교종단협의화간 봉행한 위령제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는 일제의 폭정을 피해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18만명이 1937년 구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했다. 지금은 3-4세대가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동쪽으로는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남서쪽으로는 르크메니스탄,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한다. 북서 일부는 아랄해에 면한다. 125개 민족이 공존하는 다민족국가이며, 국명은 ‘우즈베크인의 나라’라는 뜻의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다. 국토는 남북간의 거리가 925km, 동서간은 1,400km이며 면적은 약 447,400㎢ 로 이 면적은 우리나 라 남북한을 합친 면적의 약 두배이다. 동쪽 국 경 지대 5분의 1은 산악지방으로서 동북부 쪽은 텐샨산맥의 산자락에, 서남부 쪽은 파미르 고원에 부분적으로 걸쳐있다. 이 산악 고지 대중 높은 곳은 해발 4,000m가 넘는 고지대들인데, 이곳 고지대 산악의 눈 녹은 물과 지하수로 인하여 관개사업이 전개되어 비가 없는 사막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면화 생산국이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2000년 현재 약 17만 5천여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현재 구소련 공화국 가운데 우즈베키스탄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중 약10만명 이상이 수도인 타쉬켄트 지역에 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은 역사적으로 1937년 이전까지 연해주 근방에서 강제 이주해 왔다

1937년 스탈린은 약 18만 명의 고려인들을 그들에게 전혀 생소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이유는 무엇보다도 중일전쟁이 본격화될 경우 일본이 극동지방의 고려인들을 일본의 소련 침략에 이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 소련 당국은 근본적으로 고려인들을 믿지 못하였는데, 고려인과 러시아인과의 충돌도 자주 발생하였다.

1937년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을 1,800대의 화물 열차로 9월 하순경부터 시작하여 12월경까지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였다. 고려인들은 마치 짐승처럼 화물 열차에 태워져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까지 6,000km의 거리를 3-4주에 걸쳐 이동되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과 노약자들이 병사하거나 사고로 죽었다.

1937년 소련정부가 연해주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일. 이는 국경지방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일본의 스파이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예방조처로 취해진 것으로서, 스탈린의 민족 강제이주정책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 결과, 연해주에 있던 한인 약 20만 명이 모두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크 등지로 이주되어 소련시민으로 동화되었다. 그러나 이주 과정에서 수천 명의 인명과 막대한 재산손실을 빚어냈으며, 현재도 당사자인 한인교포들은 소련정부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불굴의 의지로 이뤄낸 삶의 터전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에 대한 공식적인 이유는 ‘극동지방에 일본 정보원의 침투를 차단하기 위한 것을 내세웠지만 본질은 소수민족의 해체였다. 1차 이주는 결의문 채택과 함께 시작되어 9월21일까지, 2차 이주는 9월24일부터 10월25일까지 집행됐다. 스탈린과 예조프, 내무성과 운수성의 공동작품이었다. 스탈린의 특명을 받은 류쉬코프가 총지휘를 맡았다. 1차 이주가 주로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조속히 이주시키는 목적이 있었다면, 2차 이주는 극동지방 전역의 한인들을 모두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장장 6000㎞에 이르는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그 순간부터 한인들은 새로운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한인들은 먹을 것을 전혀 공급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 역에 정차하면 간이상점에 뛰어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사다먹으면서 갔다. 또 열차에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역에서 열차가 서면 모두가 뛰어내려 대소변을 봤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어린 아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주 중에 아이들에게 홍역이 발생하여 아이들 사망률이 60%를 넘었다고 한다. 또 이주 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지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다수 발생했으며, 크고 작은 사고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한인들이 버려진 곳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인근 우쉬토베 지역,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남부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유배지로 악명 높았던 허허벌판이었다. 예조프가 스탈린에게 제출한 최종 완료 보고서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에총 2만여 가구 95,000여명, 우즈베키스탄에 1만6천여 가구 76,000여명 등 모두 171,781명이었다.

버려진 한인들의 삶은 비참했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배움의 길도 막막했다. 국가기관 취업 등 사회진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주거 환경 또한 집단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이주 다음해에 7,000여명이 사망했다그 다음해에는 4,800여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주 첫 해의 모진 학대와 고생을 이겨내며 농토를 개간하고 볍씨를 심어 대풍작을 이루었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3년 만에 자립기반을 이루는 기적을 일궈냈다. 중앙아시아의 모범적인 소수민족으로 새롭게 일어난 것이다.

한인들의 집념 덕분에 중앙아시아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다. 우지베키스탄의 폴리토젤과 김병화 콜호즈,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 아방가르트 소프호즈 등 소련 전역에서 최고의 모범 집단 농장을 이들이 일궈냈다. 척박한 땅을 옥토로 바꾼 한인들은 소비에트 농업생산의 주요 축이 되었다. 한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중앙아시아에서도 빛을 발했다. 소련이 해체된 후인 1993년 4월 러시아 의회는 과거 과오를 시인하고 고려인 명예회복 법안을 채택했다. 새로이 거주 이전의 자유를 얻은 고려인에게는 희망의 땅, 연해주로 가는 길이 다시 열렸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역사적인 재이주는 1937년 이후 단절된 연해주의 한민족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재이주는 눈에 띄게 늘었다. 전반기에는 중앙아시아 민족갈등에 따른 위기감으로, 후반기에는 경제적 생활고에 짓눌려 고려인들은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자 연해주로 돌아왔다. 현재 러시아 연방을 포함한 구 소련 내 한인은 약 45만 명으로, 인구수에서 120여개 민족 중 25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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